조선 광해군 8년, 왕권다툼과 당쟁으로 위기에 놓인 광해군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왕의 대역을 찾는다. 천민 하선이 광해군과 닮은 외모로 인해 왕의 대역을 맡게 된다. 폭군이던 광해군과는 달리 하선은 따뜻한 인간미로 궁중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백성을 위해 대동법을 도입하고,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한다.
기상 이변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온 지 17년째 살아남은 인류는 기차 한 대를 타고 끊임없이 지구를 돈다. 열차 꼬리칸에는 빈곤한 하층민들만 따로 모여 있다. 꼬리칸 사람들은 젊은 지도자 커티스를 중심으로 앞칸 상류층에 대한 폭동을 일으킨다. 커티스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맨 앞 칸까지 질주해서 기차의 설계자이자 절대권력자 윌포드 앞에까지 도착하게 된다.
‘탁월한 지도자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하선(이병현)과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에게서 힌트를 찾아보자.
귀하게 대하기와 역할 찾기
보름간 왕의 역할을 했지만 사실 하선은 기방 취객들을 상대로 만담이나 하며 살아가던 천민이었다. 그가 왕의 대역을 하기로 한 것도 도승지 허균이 제안한 은 20냥 때문이었다. 변변한 재산이나 미래를 위한 꿈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던 하선이었지만 영화의 말미에 그는 조선의 어느 왕보다도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 된다. 한번은 신하들이 백성들의 안전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명나라를 위해 군사와 궁녀들을 보낼 것을 주장한다. 이에 하선은 신하들에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접,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라고 외치며 백성을 살리는 실리외교를 명한다.
<설국열차>의 커티스 역시 처음부터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몇해전까지 꼬리칸의 건달 같은 사람이었다. 꼬리칸의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인육을 먹기도 했고, 인육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어린 아이를 잡아먹기 위해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빙하기 전 인류의 지도자였던 길리엄이 아이 대신 자신의 팔을 내놓는 것을 보고 그의 삶이 바뀐다. 커티스는 이전과 달리 꼬리칸 하층민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게 되고 그렇게 꼬리칸의 지도자가 된다.
그런데 영화 초반 어눌하게 왕의 대역을 하던 하선은 어떻게 탁월한 왕이 되었고, 꼬리칸의 건달이었던 커티스는 어떻게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을까? 사실 그들은 타고난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자였다.
<광해>에서 하선이 왕의 대역이 된 후 궁중 사람들이 그를 천민이 아닌 왕으로 대했다. 하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허균과 조내관, 어의 정도였고, 나머지 사람은 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선은 궁중사람들에게 왕 대접을 받는다. 이를 통해 하선은 스스로 왕으로서 해야할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선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대역이지만 왕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왕을 하늘처럼 생각하던 시절에 천민이 감히 왕이 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록 천민이라 하더라도 왕의 역할을 맡은 후부터 하선은 상식에 기초하여 백성을 섬기는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설국열차>의 커티스 역시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길리엄의 숭고한 희생으로 변화되었다고는 하나 당장 지도자 역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리엄이 멘토가 되어 그를 지도자로 키우고, 사람들 역시 변한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지도자로 대했을 것이다. 또한 지도자라는 역할을 맡은 후 커티스는 꼬리칸 사람들의 삶을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되고 하층민의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구체적인 폭동 준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선과 커티스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주민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배울 수 있다. 현재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본다면 주민은 그저 한량이나 건달처럼 어떤 가능성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주민을 귀하게 대하면 그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변화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주민의 역할을 함께 찾는다면 주민은 그에 맞는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민을 가능성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귀하게 여기고 역할을 찾는다면 하선과 커티스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걸어간 만큼 성공
<광해>에서 선정을 베풀던 하선은 보름 후 진짜 광해군이 돌아오는 시점을 맞게 된다. 허균은 하선에게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라는 말로 진짜 왕이 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하선은 누군가의 희생을 염려하며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도망가기로 한다. 폭군인 광해군이 돌아온다면 보름간 하선이 했던 백성을 위한 정책이 도루묵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설국열차>의 커티스 역시 우여곡절 끝에 절대권력자 윌포드와 만나 그를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윌포드의 설득에 휘말리면서 혼란에 빠지는 통에 윌포드를 제거하는데 시간을 지체한다. 그리고 그가 계획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하선과 커티스 모두 자신이 원했던 변화를 완전히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패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까? <광해> 마지막 장면에서 광해군이 백성을 위한 외교정책을 펼친 왕이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하선의 백성을 위한 정책들은 선례가 되어 이후 다른 왕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은 빙하기가 끝난 기차 밖 세상으로 인류가 한발 내딛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커티스가 꿈꾼 하층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류의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주민들의 활동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느 때는 잘되고 있는 것 같다가도 곧 동력을 잃고 흐지부지 될 수도 있다. 탄탄한 조직을 이어가다가도 다음 지도자를 세우지 못해 해체되는 주민모임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이를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백범 김구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삼팔선을 넘으며 서산대사의 시로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눈 덮인 들길을 걸어갈 때에는 행여 그 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마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어쩌면 주민들도 하선과 커티스처럼 자신들이 힘써 걸어간 만큼이 지역을 변화시키고 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귀한 한걸음을 내딛은 것인지도 모른다.
주민을 귀하게 대하고 그와 함께 역할 찾아 함께 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를 통해 주민은 스스로 가능성을 찾게 되고 역할에 맡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주민이 움직이는 걸음은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주민들과 함께 성공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면 <광해>의 하선과 <설국열차>의 커티스에게서 배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