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경 가족, 감추고 싶은 슬픈 자화상
여기 가계빚으로 인해 해체된 가족이 있다. 아버지, 큰 딸, 작은 딸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5년 전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서울에서 강원도 두메산골로 도망가게 되었다. 하지만 우연히 빚쟁이들에게 발각된 후 아버지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두 딸 역시 아버지와 헤어져 서울 거리에서 노숙하는 신세가 된다.
스물을 갓 넘긴 큰 딸은 우여곡절 끝에 취직을 하지만 60만원 월급을 받는 식모가 된다. 다행히 주인집에 얹혀살게 되어 노숙과 끼니걱정은 면했고, 돈이 없어 초등학교에 다닐 수 없던 작은 딸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 아버지가 돌아올 지, 어떻게 돈을 벌어 자립할 수 있을지 미래는 온통 불투명하기만 하다.
이들이 바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 속 세경과 신애다. 세경과 신애라는 이름만 지우고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 아닌가? 우리가 흔히 위기가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예전에 오일쇼크가 난 뒤에 사람들이 정말 어렵게 살았다. 그러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우리의 삶이 알고 보니 한 발만 떨어지면 얼마나 위태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된 거다. 빚 때문에 초등학교조차 못가는 신애의 이야기는 그런 것들의 반영이기도 하다.” 김병욱 감독 인터뷰 중 (텐아시아 2009.09.10)
지붕킥의 세경은 사려 깊고, 똑똑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얼굴마저 예쁘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그녀에게도 없는 것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돈과 학력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그 두 가지 말이다. 단 두 가지가 부족할 뿐인 그녀는 하루 종일 주인집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 비해 부잣집 자녀들이 특목고, 명문대에 진학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동생 신애의 미래 역시 세경의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에서나 지붕킥에서나 가계빚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빈곤은 대물림되는 중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채플린의 말처럼, 동생의 학용품을 사주기 위해 먹기대회에 나선 세경은 행위자체에서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슬픔을 느끼게 한다.
순재 가족, 행복하지 않은 개인주의자 집단
김병욱 시트콤의 근간은 가족이다. <순풍산부인과> 서는 오지명, 선우용여와 박영규, 박미선 그리고 미달이까지 삼대가 사는 집이 주요 무대였고, <거침없이 하이킥> 역시 이순재부터 시작하는 삼대의 대가족이 주인공들이었다. 그렇기에 스무살 세경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식모살이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붕킥의 주인공인 세경과 신애 역시 대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순재 가족은 외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조건을 지녔다. 순재 가족은 정원이 있는 넓은 단독주택에 사는 부자다. 또한 할아버지부터 아들, 딸, 사위, 손자, 손녀까지 삼대가 모인 대가족이다. 혼자 사는 외로움 따위는 애시당초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외적 조건 속에 순재 가족은 행복한가?
가족은 전통적으로 가장 친밀한 관계의 집단이며,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건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정서적 결합을 의미했다. 하지만 순재 가족은 좀 다르다. 할아버지 순재는 경제권을 가진 최고 권위자로 뭐든 제 맘대로 하며, 특히 김자옥과의 연애를 시작한 후엔 가족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연애에만 치중한다. 딸 현경은 남편 보석에 대한 믿음이 없으며, 사위 보석 역시 가족 전체를 보듬기보다는 자신의 일신과 흥미만을 추구한다. 손녀 해리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올 만큼 이기적이며 고집불통이다.
가족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모래알 같은 개인주의자들이 모여 이룬 가족인 것이다. 이는 가족 중 누구도 해리에게 진심으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예전 같으면 어느 부모가 빵꾸똥꾸를 입에 달고 사는 버릇없는 고집불통 아이를 그냥 두겠나, 게다가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에서 말이다.
순재 가족의 행복지수는 또래인 신애와 해리의 비교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해리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제멋대로 하고 있지만 도무지 만족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해리가 가장 많이 하는 대사는 가족이나 신애의 물건을 탐하며 말하는 “다 내꺼야” 내지는 불만을 담아 내뱉는 “빵꾸똥꾸”다. 해리에게 만족감이란 채우고 채워도 결국 모자란 밑 빠진 독과 같다.
그에 비해 신애는 애초에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게 없는 식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누리는 것들에도 감동하고, 특히 먹는 것에 대한 만족도는 지붕킥 등장인물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동하는 사람이니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다. 현재 해리와 신애 중 누가 더 행복한 것일까?
자옥 가족, 가상가족의 명암
순재 가족은 (실제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자옥 가족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순재 가족이 혈연으로 맺어진 데 비해 자옥 가족은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들의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자옥 가족은 서로의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며, 진심으로 대화하기를 즐긴다. 자옥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외국인 줄리안을 포함한 하숙생들을 보듬는다. 하숙생들은 비슷한 나이이며 졸업을 앞둔 대학생, 시간제 근로자, 취업준비생 등 사랑과 취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묶여 있어 친밀도가 높다. 그러니 순재네 혈연가족보다 자옥이네 가상가족이 더욱 가족애가 넘치는 상황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옥은 아직 미혼이라 부모나 배우자로서 가족을 이룬 적이 없고, 정음을 비롯한 하숙생들 역시 실제 혈연가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개인주의로 흐를수록 가족보다는 관심사가 비슷하거나 목적이 같은 사람들의 친밀감이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나면 편하고 말이 통하니 좋고, 가족만큼의 부담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점에서 자옥 가족은 세경 가족과도 다르다. 세경 가족에게 아버지의 빚이 두 딸의 삶에 직격탄을 날리는 부담으로 작용했다면, 자옥이 만약 큰 빚을 진다해도 하숙생들은 그저 새로운 하숙집을 찾아 떠나면 그만일 뿐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붕킥, 우리 시대 가족의 자화상
경제적 짐에 짓눌린 세경 가족, 돈도 많고 식구도 많지만 가족애가 없는 순재 가족, 인정이 넘치지만 부담 없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자옥 가족. 세 가족의 모습은 분명 우리 시대 가족들과 닮았다. 지붕킥을 보며 당신이 꿈꾸는 가족의 상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게 얼마나 현실가능한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바로 그 관점에서 클라이언트 가족을 대한다면 어떨까. 지붕킥은 재미있는 시트콤이지만 동시에 사회복지사들에게 많은 함의를 던져주는 우리 시대 가족의 자화상이다.
- [Social Worker] 2010년 3월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지역사회조직팀 김상진 (http://blog.naver.com/binson79)